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빈 공방전 (문단 편집) == 전개 == [[파일:FA9TCUt.jpg|align=right&width=400]] 하지만 사전에 계산된 것이었든 다소 우발적인 것이었든, 이대로라면 오스트리아 정복도 어렵지 않으리라는 판단은 큰 오산이었다. 이미 헝가리로 향할 때부터 폭우가 내린 바람에 수많은 보급 수레와 대포를 길에 버리고 온 상황이었고, 보급에 동원할 [[낙타]]도 거의 대부분 죽는가 하면 군사들 사이에 전염병까지 퍼졌기 때문이다. 결국 빈에 도달했을 때 오스만 제국군은 제대로 된 전투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반면 빈의 합스부르크군 2만은 보급품도 충분하고 역병의 공격도 받지 않아서 사기가 높은 편이었다. 빈에 도착했을 때, 평소처럼 싸울 수 있는 오스만 제국 병사들 가운데 3분의 1이 [[시파히]], 즉 [[기병]]들이었다. 물론 평소에도 오스만 제국군의 주력부대는 시파히였지만, 기병을 공성전에 동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스만 제국군은 빈의 성채를 향해 강력한 포격을 퍼붓고 갱도를 파는 등으로 공격을 감행했지만, 니클라스 살름이 지휘하는 빈의 수비군은 이를 효과적으로 잘 막아냈다. 10월 6일에는 땅굴을 파는 오스만군을 합스부르크군이 알아차리고 8천의 병력으로 공격하여 이미 파여진 땅굴을 파괴했고 10월 11일에 쏟아진 비는 남아 있는 땅굴들마저 무력화시켜 공성전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공성이 뜻하지 않게 1개월 가까이 장기전으로 이어지면서 오스만 측의 보급에도 문제가 생겼다. 빈 주변의 주민들은 모두 빈 요새로 피신했기에 물자의 현지 조달은 당연히 기대할 수 없었다. 보급이 열악해지면서 오스만군 내에서 탈영자가 속출했다. 군마를 먹일 먹이조차 바닥을 드러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봄부터 폭우가 쏟아진 것도 모자라 평소보다 일찍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예니체리]]들마저 끝장을 내자는 각오로 총공격하거나 철수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목소리를 내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결국 쉴레이만은 휘하 지휘관들을 모두 불러모아 회의를 연 다음 이기면 빈을 점령하는 것이고 패배하면 그대로 철수하기로 한 채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10월 12일에 감행된 최후의 총공격도 니클라스 살름과 수비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했고[* 니클라스 살름은 이때 벌어진 공방전에서 직접 싸우다가 중상을 입어 사망했다.], 오히려 막대한 사상자만 발생했다.[* 약 1만 5천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쉴레이만은 철군 명령을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